본문 바로가기

나의생각

[책]이타적 유전자를 읽고

<이타적 유전자>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수많은 생물학 연구 성과와 동물 행동들에 대한 관찰 기록들, 인류학의 연구 성과들을 토대로 인간의 본성에는 이기적 유전자임에도 개체로는 이타주의가 되며 협동성이라는 본능도 존재함을 증명하고 있다. 동물의 생활을 관찰을 통해 인간의 본능적 측면을 설명한다. 실제의 생활을 토대로 이루어진 여러 가지 이론은 실생활에 유용하게 접목할 수 있는 재미를 주는 동시에 일관되게 ‘호혜성의 원칙’을 설명하는 중요한 예시로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성질을 바탕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정치와 사회현상에 대해 생각할 소재를 많이 주는 책이다.

 우리는 흔히 내가 속한 집단이나 가족 또는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생명체는 오로지 ‘유전자’에 얼마나 이익이 되는지에 따라 행동 방향이 결정된다고 했다. 인간은 이기적 속성을 갖는 유전자들이 모여 만들어졌고, 유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육체라는 것은 자기 보존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일회성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이기적 단위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당연히 ‘이타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제목에서부터 <이기적 유전자>를 따라한 <이타적 유전자>의 저자인 매트 리들리도 이와 같은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을 기본적으로는 인정한다. 그러나 매트 리들리는 ‘이기적 유전자’를 바탕으로 이타주의를 끌어냈다. 그의 생각을 담은 이 책에 따르면, 우리의 유전자는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벌이는 것보다 ‘다른 개체들과 협동해 진화’하는 방식을 선택했다고 한다. 실제로 우리 몸의 유전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유전자들은 협동 과정을 거쳐 자신의 이익을 얻고 있다. 서로 도와 가며 염색체를 만들고, 세포를 형성하며, 세포들이 모여서 기관을 이루게 되고, 생명 활동에 필요한 각종 단백질이나 호르몬 등을 생산하며, 이러한 신체 기관들이 모여 하나의 개체를 이루게 된다. 복잡한 사회와 문화를 형성해 살고 있는 인간도 결국 이기적 유전자들의 협동이라는 동물적인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협동은 순수한 의무감이나 희생을 무릅쓰면서까지 헌신적으로 타인을 돕는 그런 도덕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이기적 유전자들이 살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한 것일 뿐이다. 

 뉴스에서도 곧잘 나오는 자신은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수천만원을 기부한 사람에 대하여 찬사를 보내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해, 내가 아닌 사회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그런 이타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요를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의 기부는 순수하게 이타적인가?’에 대한 질문에는 다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물질적으로는 자신의 것을 희생하는 행위였을지 모르지만 그는 그에 상응하는 평판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의 행위에 따르는 순수하게 이타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저자는 ‘그런 사람은 없다.’라고 말한다. 이타주의는 사회의 이기성 실현을 위해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교육되어 온 환상일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 각 개인들 역시 누군가가 보이는 이기적 행위에 대해 당장의 손해는 없을 지라도 거부감을 갖는 것은 이타적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잠재적 손해 에 대한 무의식적인 경계일 뿐이다. 이타주의가 결국은 이기주의의 이기성을 실현시키는 또 다른 방법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면, 의문이 있다. 순수하게 선과 악의 개념으로 이기주의나 이타주의를 바라보고 구분을 하는 것이 타당하냐는 것이다. 결국 이기적인 존재의 이기성의 표출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느냐가 문제시 될 뿐 도덕의 개념을 들여와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다수의 이기성의 실현에 도움이 되는 이타주의가 선호되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사회적으로도 이타주의가 ‘선’또는 ‘도덕’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강요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작가가 이 책에서 꾸준히 말하는 것이 인간에게서 호혜적 이타주의가 발달했다는 것이다. 호혜적 이타주의란 선한 의도에서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목적에서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데 그 이유는 그에 따른 대가를 바라기 때문이다. 여기서 대가는 사회적 명성, 물질적 보답 등 그 어떠한 형태라도 가능하며 단기적인 대가일 수도 있고 장기적인 대가일 수도 있다. 이 책에서 예로 든 것이 만약에 두 친구가 레스토랑을 동업한다고 할 때 한 사람이 주방을 맡고 다른 한 사람이 계산대를 맡으면 둘은 서로를 쉽게 속일 수 있다. 주방장은 재료 구입비를 늘려 기입하고 계산을 맡은 사람은 장부를 조작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합리적인 사업가라면 사기를 당할 것이 두려워 처음부터 동업을 하지 않을 것이고, 만약 시작했더라고 합리적인 파트너가 사기를 칠 것이라고 예상하고 먼저 사기를 쳐서 결국 사업을 망쳐버리고 말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러한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로를 믿고 동업을 하여 혼자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되는데 이는 사람이 비합리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감정마저도 인간이 이득을 얻기 위해 이기적인 목적으로 진화한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생명 활동이 이기적 유전자들의 결과물이라면,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어디에서 발생할까? 개미나 벌, 침팬지처럼 인간도 집단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사회는 동물의 집단 사회와는 확실하게 구별된다. 이 책에서 얘기하는 인간 사회의 장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노동의 전문화’이고, 다른 하나는  ‘호혜주의’다. 

 노동의 전문화가 된 사회는 노동이 전문적으로 분화되면서 기술은 점차 분화되고, 축적이 용이해지며 더 많이 생산하는데도 유리해졌다. 그 생산물을 시장에 유통시켜 서로간의 거래를 통해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사회성 또는 인간이 사회를 형성하는 이유는 이타주의적인 본성 때문이 아니라 생산성을 높여 이익을 극대화시키려는 극히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호혜주의의 예는 책에서 ‘음식 나눠 먹기’, 특히 육류 나눠 먹기로 예시했다. 침팬지도 음식을 나눠 먹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미를 위해서다. 간혹 침팬지가 사냥하는 경우는 자신의 영양 섭취와는 관계가 없으며, 발정 난 암컷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뿐이다. 그러나 인간이 음식을 나눠 먹는 행위는 생산 여건 때문이다. 수렵 생활을 하던 원시 인간들은 하나하나의 개체로서는 강하지 못하였다. 그러니 많은 머릿수를 동원해 사냥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함께 얻은 포획물은 나눠 먹어야 했다. 특이한 것은 사냥에 참여하지 않은 동료에게까지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는 점이다. 이 것은 오늘 먹이를 잡은 사람이 내일도 먹이를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그 당시 음식을 나눠 먹는 행위는 불운을 대비해 보험을 들어 두는 것과 같은 행위였다. 그래서 리들리는 음식을 나눠 먹는 전통도 결국은 호혜성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리들리가 이렇게 이기주의의 호혜성을 강조하는 의도는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이기주의는 숭고하지 않다고 여긴다. 인간을 자연 그대로 내버려 두면 다툼만 일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절대 권력이 존재해야 한다는 홉스의 주장부터, 이기주의를 조장하는 물질의 사적 소유를 폐지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리들리는 그동안 철학적 논의들이 대부분 인간의 본능인 이기주의의 호혜성을 알지 못한 채 이루어졌다고 비판한다. 그는 인문·사회 과학이 인간의 본능과 특징을 배제하고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접근했기 때문에 겉만 맴돌 뿐이라는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환경 파괴를 우려하는 생태주의자들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오지의 원주민들의 삶을 제시하며 대량 소비사회를 도덕적으로 비판하거나 국가를 통한 생산과 개발의 규제를 촉구한다. 그러나 리들리는 이 방법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리들리는 환경 보전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도덕적 교훈이나 국가가 아니라 이기적 주체들의 호혜성에 호소해야 한다고 말하며, 따라서 국유화보다는 사유화가 여러 가지 예시 등을 통하여 더 나음을 입증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를 가진 점은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이유를 유전자와 같이 근본적인 사실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유전자란 현재의 기술로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조작하거나, 변형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정해진 인간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전자에 기초하여 인간의 도덕과 윤리를 설명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자의적인 판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인간이 타인을 배려하는 이타성의 이유 역시 바로 유전자 때문이라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기적 유전자'라는 개념이 말하듯이, 인간은 본래 자신의 유전적 형질을 유지, 발전시키는 유전자의 운동에 의해 사고하고 활동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모든 인간의 도덕적 사고와 활동은 고상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결국 이기적으로 자신을 유지하려는 유전자의 운동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타인을 배려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과정이 인간의 삶이자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전자를 통해 인간의 도덕을 설명하는 방식, 그리고 다양한 실험과 관찰에 근거한 것이기에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우리가 천부적으로 가지고 태어날 수밖에 없는 유전자에 의해 우리의 사고와 활동은 규정될 수 있다는 결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만족해야만 할까? 

 <이타적 유전자>는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합리성이란 바로 이기심의 발현이라는 것을 지적하지만, 그 이기심과 더불어 인간은 호혜성과 협동이라는 상호배려를 유전자처럼 지니고 태어났다는 것에 주목한다. 물론 이러한 상호배려가 이기심의 표현에서 비롯되지만, 문제는 이기심이냐 이타심이냐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려가 고유하게 타고났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나아가면 국가 위주의 경제정책, 교육, 문화 정책을 비판한다. 이러한 시도는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기에 인간본성을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주장은 자유시장논리나 개인주의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책에서 말한 내용은 인간본성의 인위적 통제나 조작이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이다. 또 감성과 이성이 도덕적 판단과 행위에 동일하게 영향을 끼친다고 지적한다. 도덕이 이성적인 영역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이성과 감성이, 그것이 이기심이건 이타심이건, 상호작용을 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감성이건 이성이건 유전자와 같이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성으로서 인정하고 확장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자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은 동물의 관찰의 예에서 보다시피 귀납적 사고방식이 가지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인간의 행위에 대해 구체적 대안을 제시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진다. 그 동물과 인간을 비교하여 인간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객관적일 수 있는가라는 의문도 든다. 그러나 여러 가지 철학적 난제들을 해결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 할 만 하다. 정신의 영역에 대립된 몸이 아니라, 정신과 자연성의 통일체로서 몸을 재해석하려는 시도이다. 이기적 유전자의 경쟁을 통한 진화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협동을 통한 진화도 존재하며 오히려 이 것이 인류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에 대해 이타적 유전자로 설명했다. 작가의 시도는 생명현상을 사회학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해석하려했고, 새로운 시대에 있어서 인류의 생존 양식이 더불어 사는 삶 이어야 한다는 다분한 결론을 유도했다. 즉, 작가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타적인 성향이 있다는 것을 알리려고 했다. 

이타적 유전자는 인간이 보이는 몇몇 이타적 행위가 결국 인간은 이기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인간의 도덕적인 행위도 인간의 유전자 이익을 가져오기 위한 하나의 이기적 행위라고 보는데, 예를 들어 인간은 가족끼리 챙겨도 다른 사람에게는 무정하다. 동물도 개미 집단과 같은 경우 자신의 몸까지 희생하지만, 다른 개미 집단을 보면 마구 공격. 개미는 생식이 불가능. 여왕개미는 가능. 다른 동료 개미가 형제. 즉, 유전적 유사성이 높은 개체끼리는 서로를 위해주는(유전자 보전 때문에) 이타적 행위가 나옴. 어떤 개체에게 이기적이니 이타적이니를 결정하는 것은 자신의 유전자와의 유사성에 관련해 있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머니의 희생정신과 같은 문제다. 어머니는 유전자의 보존을 위해 그러는 거라고 말한다면...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던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간 많은 사람들. 마더 테레사 같은 분은 도저히 이기적 인상상의 상식선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다. '다른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 행동, 상상' 등을 통해서 자신이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에 봉사 한 것이다. 나같이 평소 규칙적인 봉사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은 봉사활동을 해도 큰 기쁨을 못 느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힘든 육체적 노동을 직접적 이익 없이 한다는 것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푸는 동기가 그 행위로 인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라면 그 사람은 이타적이 아니라 이기적이다. (기독교인, 천국에 들어가려면 선행을 하라고 가르친다. 천국이란 그들의 이기성을 움직이기에 충분한 뇌물이다.)
협동적 인간은 이타주의가 아니다 그는 단기적 이익보다 장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일 뿐인가? 감정이라는 것은 물질적 사리 추구라는 틀로는 설명 될 수 없는 지극히 비합리적인 힘이다. 그러나 감정은 인간 본성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무엇인가를 향해서 진화해왔다. 인간의 감정은 합리적 계산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미래의 비용을 현재 시점으로 앞당겨 도입함으로써 헌신성 문제의 결과를 바꿔놓는다. 비합리적 격정이 범칙의 욕망을 좌절시키고, 죄책감 대문에 남을 속여 이익을 얻는 것이 고통스러워지며, 덕이 있는 사람에 대한 선망이 사리추구를 자제하게하고, 치욕감이 존경받을 만한 행위를 유발하며, 동정심이 호혜적 도움을 만들어낸다. 도덕 감정을 포함한 인간의 감정적 습성에는 보답이 있다. 우리가 비이기적으로 호의적인 행동을 할수록 우리는 사회적 협동의 열매를 더 많이 딸 수 있다. 비합리적인 감정에 의존해 기회주의를 초월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