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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생각

[책]탈학교 상상력을 읽고

우리는 학력 지상주의 속에 살고 있다. 중·고등학교에서 치열한 경쟁을하고, 소위 명문대 출신들이 사회에서 더 요구받고 있다. 이런 학력 위주의 사회에 대해 비판을 가한 책이 이한의 “탈학교의 상상력”이다. 그는 우리 교육 현실의 주요 모순을 학력 제도에 있다고 말하고, 궁극적으로 이와 같은 학력을 사회에서 사라지게 함으로써 교육의 원래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교육이라는 것을 말하면 학교 활동과 연관을 짓는 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교육은 학교와 동의어가 아니다.

이 책의 저자는 교육의 의미를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만나 경험과 지식, 지혜와 기술을 나누는 활동” (p.255) 이라고 정의했다. 한정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의미 없으며, 삶 속에서 수많은 교육 과정이 교차하며 인간으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또 이 책의 저자는 오히려 학력 제도는 자본주의 사회가 추구하는 효율성의 측면조차 심각한 모순을 범하고 있다는 점을 예시나 조사의 결과로 증명한다. 따라서 학력을 폐지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의 효율성을 추구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것이다.

책에서 한가지 재미있는 얘기들이 있다. 오징어행성 왕자의 이야기, 연애 왕국의 이야기, 흡혈귀에 대한 이야기 이렇게 3가지 이야기를 써서 현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했다.

오징어행성이야기는 외계인이 지구인으로 잠입하여 한국의 교육의 현실을 완전히 제 3자의 입장에서 관찰한 것처럼 쓴 것이다. 그러나 이 외계인들은 계속해서 ‘교육’을 ‘게임’이라고 규정지으며, ‘시험’도 단순히 ‘암호풀이’라고 치부해 버렸다. “‘대학’이라고 이름 붙은 새로운 서식지에서 살아갈 권리증이다. 오징어 행성에도 왕족과 귀족 그리고 천민이 사는 서식지는 구분되어있다.” (p.24) 라면서 대학이라는 것을 마치 신분사회에서의 보다 더 상급계열로 진출하기 위한 상-하적 관계로 보았다. 즉, 학력이 우리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예를 보여준 이야기이다.

두 번째의 비교 예는 연애 왕국의 이야기이다. 즉, 이 왕국은 우리의 ‘학교’에 비교될 만한 것이 ‘연애센터’이고, 이 왕국에서는 연애가 사회의 기반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저자는 계급을 나누어 놓았다. 킹카, 눈높이, 빙시, 폐인 등과 같은 계급으로 나누어지고, 이 것은 역시 학력의 문제를 꼬집어 낸 것 같다. 이 창작 글 안에서 못생긴 뚱보 주인공 칸나에 대한 ‘유리는 괴로워’라는 만화에 대한 이야기(p.51)가 나오는데, 뚱보가 성형을 하여 미녀가 된 뒤에 겪게 되는 사회의 인식이 긍정적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즉, 외모에 의한 차별을 통해 학력에 의한 차별을 설명한 것이다. 이 점은 이 구절에서 잘 알 수 있다. “다른 외모에 따라 그 사람이 사는 세계가 분단되어 있는 것처럼, 다른 수료증에 따라 서로 분단되어 있는 다른 세계가 펼쳐지잖아.” (p.52)  또 이 왕국에서 사회적으로 따돌림을 받는 반체제 집단이 있는데, 소위말해 문제아 집단이다. 이 집단은 아마 저자의 분신정도로 설정 된 것 같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건 센터에서 연애 연습을 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원래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 거야. 우리 스스로의 성장력이 람바를 만들어 내는 거고, 사람들은 단지 다른 데서 자유로운 연애를 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센터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마치 센터 덕분에 연애 할 수 있게 된 것처럼 생각하는 거지.”(p.65) 이 문구에서 잘 비유 되었듯이 바로 이 구절에서 저자의 생각이 고스란히 들어났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의 능력은 학교에서 배운 공부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고, 우리는 학교 때문에 자유롭게 자신에게 필요한 공부를 못하고 있으며, 단지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학교 때문에 자신이 직장에서 일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2부에서 얘기를 하겠지만, 학교공부와 직업능력은 상관관계가 많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여러 가지 연구 자료가 있다.

세 번째의 얘기는 흡혈귀들의 연쇄 살인에 관한 이야기인데, 처음 읽을 당시 정확히 의미를 알 수 없지만, “학력제도는 끊임없이 사람을 죽여 가는 활동이 인플레이션 되는 흡혈귀의 원시적 경쟁과 마찬가지라는 뜻이군요. 그 과정은 ‘피를 말리는 것’에 비유될 수 있고요.” (p.253) 라는 구절을 통해 어느 정도 되짚어서 추측 할 수 있게 되었다. 즉, 학교의 경쟁으로 인한 폐해를 비유한 것 같다. 이 이야기는 의문의 연쇄살인이 계속 일어나는데, 그 범인이 흡혈귀들이고, 연쇄살인이 일어난 배경은 지도자급 흡혈귀를 투표하는데 있다. 그 후보들이 투표에서 당선되기 위하여 과시하던 중에 이런 일들을 벌인 것이다. 여기서 지혜가 넘친다고 표현한 노흡혈귀가 한 말은 “흡혈귀들은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는지도 모르고 광란의 축제(연쇄 살인)에 함께 하고 있지...”(p.85)이다. 즉, 우리가 학교에서 경쟁하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책의 1부에서는 읽기 쉽도록 암시적인 의미만 창작 글에 담아 놓았다. 여러 대화 상황에서 저자의 학교에 대한 생각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2부에서는 학력폐지를 주장하며 여러 가지 연구 자료라던가 비교 예를 통하여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 하였다.

보통 교육 문제를 복잡하다 하여 얽혀있는 실타래에 비유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실제로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되며, 또한 그것의 폐기가 문제의 가장 핵심적인 요건이 되는 어떤 모순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을 학교와 시험에 얽어매고 교육 본연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동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한 관심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모순의 근원을 진지하게 파고들어 가야 한다면, 필연적으로 우회할 수 없는 제안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학력의 폐지’와 ‘직무 능력 평가 제도의 사회화’이다. 이 말은 학력이 직업에서의 능력과 어떠한 상관관계도 없기에 주장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가 제시한 자료들에 의하면 실제로 직장에서 학교의 교육보다 직업교육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각 직장이 원하는 능력을 가지게 했다고 한다. 학교에서 배운 대부분의 내용은 곧 잊혀지게 되며, 직무 수행에서 필요한 것들을 새로 배워야한다는 말이다. 저자는 또한 높은 학력을 가진 사람이 새로운 지식과 기술 습득을 좀더 쉽게 해주고 능력이나 인내심 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체로 높은 생산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학력을 기준으로 고용한다는 의견에도 Berg의 연구 결과를 예를 들며 반대한다. 박사들은 수행능력이 높았지만, 학사, 석사, 고졸 등의 능력은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또 학력이 교수와 같은 전문직을 잘 수행할 수 있는지는 예측 가능하지만, 이 역시 학력이 높은 사람에게만 대부분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학교성적은 학교에서만의 성공을 알려주지, 실제 직업 능력을 예측해주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교육이 왜곡 된 이유는 학생이 교육의 본래 목적에서가 아닌 단지 학점을 잘 받기 위해 지식이나 기술을 배우기 때문이다. 이것의 근본적인 이유에는 학력이 서열화 되어 있기 때문인데, 기업 측에서도 보다 높은 학력을 가진 사람을 원하기 때문에 교육의 본래 목적과는 달리 보다 높은 학점을 따기 시작했다. 고용주가 점점 높은 학력을 가진 취업 희망자를 가려내는 요구 조건으로 학력을 상승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높은 보상을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높은 학력을 취득하는 두 톱니바퀴가 맞물려서 일어난다. 학력이 주는 보상에는 지위, 권력, 위신, 더 넓고 유용한 인적·문화적 네트워크의 향유라고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노동시장은 고졸, 대졸 등의 학력 수준에 따라 취업문이 명백히 구분되어 있다. 노동 시장에서 취업문과 임금 격차가 존재하고, 고용 안정성면 역시 차이가 크게 나타난다. 또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승진의 가능성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가능성이 훨씬 떨어진다. 임금, 노동 환경, 고용 조건, 승진 기회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생산성 때문이 아니라 단지 학력과 결부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인적 자본 이론은 ‘고학력→고소득’의 연결 고리는 설명하지만 ‘고학력→고생산성→고소득’의 연결고리는 증명하지 못한다. 학력 인플레이션의 존재는 학력의 주요한 역할이 신호를 부여하는 것이며, 고학력이 고소득을 보장하는 것은 고학력의 생산성 때문이 아니라 그 희소성 때문임을 보여준다.” (p.131)

이러한 사회에서의 학력 차별의 구조 속에서 대안은 무엇일까? 합리적으로 꼭 필요한 능력을 정당하게 평가해 주는 평가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분야별 절대 평가 제도’의 원칙을 간략하게 서술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절대 평가 제도여야 한다. 둘째, 누구에게나 기회가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셋째, 떨어뜨리기 위한 문제가 아니라 필요한 지식을 합리적으로 검사하는 문제여야 한다. 넷째, 문제 은행 방식으로 사전에 문제를 개방하여 시험과 관련한 전략적 비용을 줄여야 한다. 다섯째, 암기되는 지식보다 이해하고 활용하는 지식 중심으로 하여 ‘오픈 북’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여섯째, 평가 제도는 훈련제도와 유기적으로 결합하여야 하며, 훈련 제도는 일반 필기이론 교육 과정과 지나치게 길게 결합 되어서는 안 된다.” (p.137~138) 여기서 알 수 있는 ‘분야별 절대 평가 제도’라는 것은 학력으로 인해 소수 집단에게만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되면 누구든지 어떠한 분야에 도전해볼 자격을 주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사회적 격차는 현저히 줄어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물론, ‘분야별 절대 평가 제도’로 전환 할 때에 이 전 교육과정과 비교하여 차이가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할 것이다. 타자기로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키보드는 왼쪽 윗줄의 배치로 'QWERTY'라고 불리 운다. 이러한 배열이 대량 생산하여 현재 표준형으로 되었다. 하지만, 기술자가 더 새로운 키보드 배열을 개발하였는데 그 것은 'DSK'라고 불리 운다. 이 전의 ‘QWERTY’보다 최대 10퍼센트 짧은 시간에 타자를 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QWERTY’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이러한 예와 ‘분야별 절대 평가 제도’는 비슷하다. 우리는 이 전의 제도에 익숙해져 있기에 새로운 제도로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해 책의 저자는 적극 강제로 실행하고 전환의 시기를 짧게 하라고 하였다. 신호가 혼란스럽게 되면 사람들은 지금처럼 학력도 따고 각 분야별 자격증도 새로 따야 하는 상황에 처할 뿐 아니라 실제로 학력 게임에서 벗어나는 것도 어렵게 된다. 학력 게임을 그대로 두고 능력 사회로 가자는 구호는 허황된 것에 불과 한다. 즉, 이 전의 제도는 완전히 없애고, 새로운 제도를 재빨리 전환하자는 것을 국가에서 실행하라는 것이다. 이 주장이 이슈화 된다면 학력폐지법의 정당성에 대해서 논할 수도 있다. 즉, ‘각 기업에서 필요한 인력을 마음대로 뽑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문제는 고용의 평등이나 직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보다는 하위의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서로 상충되는 문제에 대해 어느 것이 더 우선인가를 생각하여야 하는데, 앞의 것은 결국 학력차별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자본을 가진 사람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양식을 다수 구성원에게 강용하는 일이다. 학력이라는 것은 특정한 형태의 교육 기관을 장기간 다녔다는 증명서이고, 이를 우월성을 상징하는 지표라고 다룬다거나 채용의 필요조건으로 요구한다면, 이는 다른 형태의 교육 과정을 거친 사람을 분명히 차별하는 것이다. 즉 사실상 특별한 학습 스타일을 강요하는 것이다.

학력 폐지하는 법안에 대해 정치적으로 실현이 가능한가? 학력 폐지에 대해 고학력의 사람들이 반발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 법안은 이 법안실현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이 법안의 통과 이후의 사람에게 보다 평등한 기회를 준다고 저자는 말했다. 학력 폐지는 정치적으로 실현이 가능하고, 오히려 이 법안을 실행함으로써 노동시장과 교육기회에 평등함을 가져오기 때문에 정치적인 벽이 높은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교육 제도는 교육 서비스를 생산하고 분배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가 효율적으로 하려면 많은 사람들에게 최저 비용으로 그들이 원하는 교육 서비스를 분배할 수 있는 것인가로 알 수 있다. 2부 뒷부분에서는 학교가 서비스의 생산과 분배에 적합한 시스템인가 하는 점을 가르쳐주고 대안적인 교육시스템을 알려준다. 학생들은 그냥 학교에서 정해진 과목을 정해진 기간에 따라갈 뿐이다. 학습 계획을 전체적으로 수정할 수도 없고, 지식을 활용하는 창조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 아닌 단지 높은 성적을 받기 위한 것이 위한 것이다. 이 것을 학습의 ‘형식화 현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학교에서는 학생을 평가할 때 시험과 같은 평가 수단에 의지하는데 다시 생각해본다면 학생이 학습 계획을 조절하고 자발적으로 공부한다면 시험 같은 중간 평가 수단은 불필요하다. 홈스쿨을 하는 아동이나 계속해서 등급을 매기지 않는 미국의 웨스턴 레즈비 의대를 예로 들면서 오히려 그러한 학생들이 성취도가 더 높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학교라는 것은 정보의 독점과 타율적인 학습과정으로 학생들이 학업에 대한 흥미를 잃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 모두가 잘 배우려면 각각의 학생들에게 맞는 교육을 하여야 한다. 어떠한 학생에게 있어서 필요한 내용을 원하는 방법으로 학습계획을 세워서 교육을 정보의 교류가 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교육에 대한 집단적 통제는 중지되어야 한다. 학습자는 다양한 주장과 생각에 접촉할 수 있어야 한다. 학교는 획일적으로 공통된 지식을 전달하는 곳이기를 당장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p.180) 라고 하며 학교에서는 모든 학생이 같은 교육을 받기 때문에 실현되기는 어렵다고 주장한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경쟁적인 교환을 함으로써 학습의 효용성을 높일 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학교에서는 이러한 교환을 하는 것이 어렵다. 학생은 자기가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이야기할 수도 없고, 생각할 겨를도 없다.

이에 대해 책의 저자가 제시한 대안적 교육의 예 중 하나가 네트워크이다. 네트워크는 지식의 교환에서 매우 유리하다. 또한 상황이 변할 때에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네트워크는 지식의 교환뿐만이 안이라 많은 자료들을 개방하여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학생이 알 수 없었던 자료들 까지 안내하기도 한다.

교육 재정 분배는 어떻게 이루어져야하는가? 많은 학교들이 교육 서비스는 향상시키지 않으면서 교육비는 교육서비스 향상 속도에 비해 더 많은 증가세를 나타낸다. 진정으로 학습에 얼마나 도움을 주는 가를 분석하여 교육 자원이 분배되어야 한다.(p.203)

3부에서는 교육의 공공성에 대해 논하고, 현재 우리나라 학교가 왜 붕괴된 것에 대해 설명하였다.

대부분 사람들은 학교는 교육의 공공성을 위해 필요하다고 한다. 본질적으로 들어가 학교 제도의 특성은 무엇일까? 저자는 “위계적 의사 결정 과정, 집단적 의사 결정과정, 퇴장의 불가, 피라미드식 선발 체제, 학교 서비스를 통해서만 분배되는 공공 교육 재정, 임금·교용·기타 사회적 지위를 결정짓는 서열화 된 학력 체제, 감시와 처벌로 대표되는 규율 권력, 계속 되는 중간 평가로 삶과 동떨어진 비자율적 교육 내용과 방식의 강제.” (p.208) 등을 이야기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제도는 교육의 공공성을 위해 필요하다고 하는데, 경제학에서 설명하는 공공재라는 것은 비경합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학교는 경합적이다. 예를 들어 교실이라는 것도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수강을 들을 때에도 경합적이다. 또한 교육은 의료 같은 기초재도 아니다. “초등학교 교육 과정 중 정말 삶에 필요한 것은 거의 없으며, 설사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실제 상황에 부딪쳤을 때 어디에서라도 배울 수 있는 것이지 6년 동안 감금 되어 일정한 순서에 다라 정해진 사람에게 배워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p.215) 결국 교육은 학교 교육을 통한 획일적 부과를 하려는 것은 틀린 방식이다.

이러한 문제의 대안은 현재 학교 체제를 내용적으로 보다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학력 자체를 폐지하고, 교육과 평가의 분리하여 실제로 삶과 연관이 되는 교육을 만드는 것을 저자는 주장한다.(p.247) “이러한 활동은 학력을 폐지하는 일, 고용·승진상의 차별을 철폐하는 법안이나 분야별 평가 제도의 수립을 위해 싸우는 일,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학습 네트워크를 만드는 일루 이루어진다.”(p.247~p.248) 교육이 학교에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보다 더 능동적인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학교에서의 상황은 학생들을 교실에 가둬놓고, 수많은 것들을 그냥 주입시키기만 할뿐,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학습은 하지 못했다. 학력은 현대판 신분 제도이기에 폐지해야 하고, 자유로운 네트워크를 통해 교육하는 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학력폐지와 같은 공감되는 내용이 굉장히 많았다. “대학생들은 예상치 못한 휴강을 맞게 되면 괴성을 지르면서 환호하는데, 휴강을 즐거워할 강의를 듣기 위해 낭비하는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참으로 기이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마치 신문사가 일방적으로 3일 동안 신문을 보내지 않았을 때 구독자가 ‘신문을 안 읽어도 된다.’고 괴성을 지르며 환호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p.165) 와 같은 구절에서 나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도록 반성할 수 있었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단지 강의가 출석과 시험을 위해 듣는 것이지, 지식을 늘리는 것이 아니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고등학교를 다니다 자퇴하였다. 학교를 다니며 이 책의 저자가 말한 것과 같이 시험과 같은 경쟁체제가 싫었고, 보다 더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물론, 주위에서 ‘너는 경쟁에서 진 것이다.’, ‘그런 경쟁이 무서워 너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지만, 자퇴에 대해서 나는 후회는 하지 않는다. 내가 예전부터 원했던 공부에 대해 도서관이나 인터넷을 이용하여 보다 더 깊이 배울 수 있었고, 내가 원하는 ‘MR’과 같은 취미생활을 즐길 수가 있었다. 내신을 유지하기위해 시험에 가슴을 졸이던 일도 없었다. 그러나 결국 검정고시를 치고 대학에 입학했다. 내가 그러한 선택을 하며 나만 느끼는 감정, 혹은 사회 전체적으로 ‘탈학교’가 분명히 주류가 아니기 때문에 나 자신이 느끼는 점일 수도 있겠지만, ‘탈학교’의 폐단도 상당히 존재 한다. 이 책의 저자가 얘기한 것처럼 자기 자아 계발이라든지 능력을 찾는다는 것인지에 대해서 과연 탈학교가 어느정도 효용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저자는 자신의 능력만 계발하고, 그러한 분야로만 투자하여 결국 사회의 효율성을 상승시킨다는 것도 일리가 있지만, 내 경험에 의해 생각해보면 내가 원하는 공부만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근시안적으로 보면 분명히 장점이 있지만, 학교에서 가지는 전인교육은 무시 못 할 정도로 많은 장점이 있다. 책의 저자가 줄기차게 주장한 창의력이라는 것도 물론 자신이 소질 있는 분야의 공부를 한 뒤 여가생활의 증가가 창의력에 보탬이 된다는 생각에도 일리가 잇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공부만이 아닌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함으로써 이를 융합시켜 더 심도 있는 창의성이 계발될 수도 있다. 또한 이 책을 읽으며 사회성, 인간성에 대한 얘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난 성격은 꽤 쾌할 한 편이었다. 하지만, 학교를 나와서 혼자이다 보니 말수가 적어지고 대인성격이 너무나도 바뀌어버린 것을 몸소 경험할 수 있었다. 친구라는 또래집단에서 멀어져 버렸다.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보다 다양한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홀로 지낼 수가 없다. 인간관계는 홈 스쿨링을 하면서 배울 수는 없는 것이다. 학교라는 것이 어느 정도 폐단이 있다고 하더라도 청소년기, 사춘기 등 우리에게 중요한 대부분의 인간관계를 학교에서 얻는다. 친구들과 서로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가치관을 확립할 수 있고,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의 고민을 토론하며 내적 성장을 일으킬 수 있다. 졸업 후의 훨씬 더 큰 사회에서 우리는 생활하게 될 것이고, 그에 대한 인간관계를 홈스쿨링에서 하는 책에서의 이론만으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저자는 교육의 의미를 경제적 방법과 몇몇 예 등으로 분석하여 어떠한 교육 방법이 더 효율적인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었다. 나는 학교라는 제도 자체가 싫어서 자퇴를 한 것이 아니라 학교에 권태로움 같은 것을 느꼈을 뿐이다. 현재의 학교 모습의 폐지를 원하는 이 책의 저자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싶다. 이해한 사람, 못한 사람 모두 섞어서 ‘다음단계를 해라’, ‘시험을 봐라’ 이런 식은 분명 옳지 못하다. 이런 옳지 못한 학교 체제에 대비하게 위해 중·고등학교부터 유급제도를 두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현 체제 학교에 이러한 ‘보완’을 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예로 “가르치는 행위에 대한 면허 제도는 타파되어야 할 대상” (p.258) 이라고 했는데 교사자격증을 타파하기 보다는 학생들을 키워내는데도 보다 더 책임감을 가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더 우선인 것 같다.

현재 우리들의 학교 교육현장은 분명 잘못된 점이 있다. 우리의 학교가 100% 절대적으로 옳은 방법은 분명 아니다. 수업시간에 조는 아이나 진도를 따라 가지 못하는 아이, 대다수가 자기가 무엇을 공부해야하는지 능동적으로 알지도 못하고 타율적으로 공부를 하는 것이 현실이다. 학력주의가 분명히 학생의 참된 배움의 기회를 빼앗고 있다. 우리는 학력 지상주의에 살고 있고 이 책의 저자가 제시하는 ‘탈학교’가 얼마나 효과적인 지를 논하기 전에, 문제점이 있는데도 비판마저 하지 않는 것은 발전을 막는다고 생각한다. 문제가 있으면 그에 반하는 각이 나와야 하고, 이 책은 그 점을 충실히 이행하여 나 자신에게 있어 보다 더 넓은 사고를 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좋게 생각한다. 현 학교 문제에 대해 서로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고, 그에 대한 절충안이 나와야 한다. 그리고 나는 현 학교의 문제점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장점도 많다고 생각하기에 학교 체제의 붕괴보다는 학교 체제에 대한 보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